멋,흥,꿈

새만금문화관광 중심으로 떠오르는 군산 근대문화유산

김주은

김주은 _ 광주문화재단 정책기획팀

12년 만이다. 중학교 때, 아버지께서 새만금간척사업을 알려주겠다며 잠시 들렀던 항구도시 군산은 끝이 보이지 않는 황량한 바다사막 같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 도시가 왜 광주문화재단 문화답사의 첫 번째 여행지가 되었을까.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자 시인 고은의 고향,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거점으로 개발된 번화한 산업도시. 한국 문학사의 위대한 족적과 식민지 역사의 아픈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군산으로 조심스럽게 발길을 내딛는다.

일본의 조선 쌀 수탈의 거점항구도시, 군산

군산. 일본의 배후지 수탈과 자원 수송을 위해 의도적으로 개발되었고 쌀 수탈의 거점도시로서 발달되었음을 보여주는 근대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는 곳. 현재 근대문화중심도시로 거듭나기 위해 자치단체와 민간시민단체가 함께 노력하고 있는 도시다.
군산 내항에 도착하자마자 하늘과 경계가 없는 바다, 점점이 정박된 크고 작은 배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지금은 항구의 기능을 잃어 ‘불 꺼진 항구’로 불리는 고요한 부두의 모습을 보면서, 숨가쁘게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쌀가마를 실어 날랐을 과거의 항구를 상상해본다.  ‘채만식 선생이 내가 지금 서있는 이 곳에서 항구를 바라보며 ‘탁류’를 완성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군산내항의 모습
옛 기찻길의 공공미술품들

‘근대문화유산의 재해석’을 주제로 본격적인 근대문화유산 탐방을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첫 번째 목적지는 항구 건너편에 위치한 옛 조선은행 건물이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바다를 향해 열린 흰 게이트가 눈에 띠었다. 물이 들어오면 수위가 높아지면서 다리가 떠오르고, 물이 빠지면 다시 다리가 가라앉는 내항 부잔교는 수탈한 쌀을 일본으로 송출하기 위해 이용했던 다리다. 조선의 백성들이 무거운 쌀가마를 지고 이 다리를 무수히 지나다녔으리라. 내항 부잔교는 그냥 스쳐 지나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 했다. 근처 옛 기찻길에는 지난해 마을미술프로젝트로 진행된 아기자기한 공공미술품들이 줄지어 서있다. 죽어 가는 공간에 예술적인 활력을 불어 넣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옛 조선은행․나가사키 제18은행은 복원공사 한창

옛 조선은행은 1923년 일제 식민지 정책의 총 본산이었던 조선은행의 군산지점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건물 외관은 수많은 역사적 굴곡과 혼란을 겪어오며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듯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현재는 내부를 전시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복원공사 중이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건물이 성공적으로 재탄생하기를 바란다. 이어서 바로 만난 건물은 정방형 형태의 흰 벽과 반달눈 같은 창문을 가진 나가사키 제18은행 건물이다. 일본으로 미곡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으로 이 건물 역시 전시관으로 조성할 예정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약탈을 위해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이 건물을 보며, 아픈 과거를 계속 보존하는 것이 옳은지, 철거해야 마땅한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군산 사람들도 치열한 고민을 거쳐 결국 아픈 과거를 문화적 자산으로 개발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 같다. 구도심 속 폐허처럼 느껴지는 이 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 기대가 된다.

복원중인 옛조선은행

나가사키 18은행(위)과 군산근대역사박물관(왼쪽)

나가사키 제18은행 옆으로 가장 눈에 띠는 건물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다.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박물관은 주변 근대건축물 규모와는 확연히 다른 웅장함을 드러낸다. 마치 청자에서 뽑아낸 듯한 푸른빛이 도는 외관이 군산 바다를 항해하는 배 같다. 구도심 부활을 위해 군산시민이 하나가 되어 유물기증운동을 벌여 귀중한 소장 유물 2천여 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도심재생을 위해서는 전문가들을 통한 도시계획과 인프라 구축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시민들의 참여와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다시한번 깨닫는다. 주변에 접해 있는 조선은행을 비롯한 근대문화유산과 조화를 이루어 잘 연계되도록 유도한다면 더욱 좋은 공간이 될 것 같다.

조선 수탈의 창구, 103년 역사의 옛 군산세관

근대역사박물관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바로 왼편에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옛 군산세관건물이 있다. 과거 군산항으로 드나들던 물품에 관세를 물리던 이 곳은 조선 수탈의 창구 역할을 했지만 건물 자체만은 유럽 양식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지녔다. 박물관의 거대하고 남성적인 모습과는 반대로 소박하고 섬세하다. 박물관의 거대한 스케일과 바로 접한 경사로가 이 건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 만큼 마음에 드는 건축물이었다. 벨기에에서 수입한 적벽돌로 촘촘히 쌓아올린 몸체, 하늘을 향해 치솟은 세 개의 첨탑, 물고기 비늘 모양의 지붕, 정돈된 정원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03년 전에 지어졌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비늘 모양 동판지붕은 비바람과 염분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거의 부식되지 않고, 고풍스런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옛 군산세관 건물과 세관 내부 모습

기존의 건물을 꾸준히 관리․보수하여 지금은 세관 관련자료, 군산역사 등을 위한 전시공간으로 만들어 학습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옛 건물을 보면, 그 당시 상황을 추리해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높은 측벽에 뚫린 손바닥만한 구멍, 벽을 뚫었다 막은 흔적 등을 발견하고 왜 그랬는지 혼자 상상해보는 일은 이런 옛 건축물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묘미이다.

세관건물을 나와 큰 길을 건너면 일본인 부유층 거주 지역이었던 신흥동 일대가 나온다. 몇 발자국만 걸어도 영화에서나 보았을법한 옛 일본식 가옥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과거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듯한 분위기가 군산만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 준다. 그중 히로쓰 가옥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일본식 목조 가옥으로 국가등록문화재이자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포목상으로 큰 돈을 번 일본인 히로쓰의 집으로 목조 2층 양식에 아담한 일본식 정원이 이채롭다.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등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아픈 역사를 섣불리 지워내기 보다는 후대를 위한 산교육의 장으로 만들고 도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워나가고 있는 근원지가 바로 신흥동 일대이다.

히로쓰 가옥 입구

‘근대유산을 문화 콘텐츠로’ 의미있는 노력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다. 한눈에 우리나라 사찰과는 다르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사찰의 화려한 단청과는 달리 간결한 색과 모양, 그리고 사방의 창문과 창살이 특징적이다. 가냘픈 곡선미가 아름다운 우리나라에 비해 직선적이고 보기에도 아찔한 75도 각도의 지붕모양은 주변 환경에 맞서는 듯한 모습이었다. 일본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기단 형식의 내진구조를 갖추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동국사

 군산에서 근대문화유산은 오늘날 현대도시의 바탕이 되는 ‘기억의 공간’이자 주변의 친근한 ‘일상의 공간’이 된다. 군산이 이곳을 철거와 환경미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역사․사회․문화적 콘텐츠로서 새롭게 조명하고 인식하려는 의지는 대단히 의미 있어 보인다. 신축건물이 대체할 수 없는 장소성의 가치까지 더해져 더욱 그렇다. 군산은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자산, 그리고 산, 바다, 강이 있는 풍부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문화관광의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다.

이번 군산 답사를 통해 지난 역사에 대해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할지, 역사적 유산을 어떤 의미로 되살려낼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조사와 선별, 정체성을 지키는 재생,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역에 대한 시민들의 애정을 보며 광주문화재단 문화답사의 첫 여행지가 왜 군산이었는지에 대한 답도 얻은 듯하다. 자, 그렇다면 광주의 근대문화유산은 어떻게 할 것인가, 새로운 고민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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