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민우 _ 연합뉴스 기자
'눈은 도를 사색하느라 감았고 / 머리는 세속을 싫어해 숙였도다 / 스스로 장자의 학문을 체득하니 / 영광과 괴로움이 하나로 여겨지네'(석천 임억령. 1496∼1568)
500년전 무등산 자락의 한 누정에서 바람과 소나무를 벗삼아 시를 짓던 선비들의 모습이 시간을 넘어 그대로 재현됐다.
지난 10월 18일 오후 남도의 대표적인 누정인 식영정과 환벽당에서 조선 중기 학자 김성원의 `서하당유고'에 그려진 `성산계류탁열도' 재현행사가 열렸다.
광주문화재단이 마련한 이번 행사에는 놀이패 신명과 문화관광탐험대가 선비들의 모습을 재현했으며 허달용 화백이 매화 그림을 즉석에서 그리는 등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3천여편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지으며 `성산시단‘의 시종으로 추앙받던 석천 임억령은 수백년의 시간을 넘어 그가 머물렀던 식영정에서 그의 후학들과 시를 읊고 주자를 논하는 모습으로 재현됐다.
`성산계류탁열도'는 16세기 혼돈의 정치상황 속에서 학문과 자기수양에 힘썼던 선비들이 환벽당과 식영정 사이의 성산계류에 모여 더위를 씻으며 시회를 즐기는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김성원, 최경회, 김부륜, 오윤 등이 등장한다.
조선 중기 학자인 김성원의 시문집인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 실린 이 그림은 당시 선비들이 풍류를 어떻게 즐기는지 잘 나와 있다.
재현행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눠 사계절 동안 선비들이 풍류를 통해 문화와 학문 전반에 걸쳐 소통하는 모습을 그려냈다.
봄인 '춘사'에서는 생전에 3천여수의 시를 남긴 석천 임억령이 시를 읊고 장자에 관한 토론을 벌인 뒤 허달용 화백이 그린 매화도를 감상했다.
이어 서하당과 부용정에서 거문고 연주를 감상한 뒤 송강 정철이 멱을 감았던 용소에서 물에 발을 담그는 탁족이 재현됐다.
가을인 `추사'와 겨울인 `동사'는 환벽당에서 열려 신명과 지조를 담아낸 시문이 화선지에 담기고 글을 받은 심성자 명인이 시조창으로 화답을 하면서 대금의 청아한 선율이 이어졌다.
이번 재현 행사는 송강 정철의 후손인 정부선 선생과 조선대 한문학과 강사인 임준성 박사가 고증을 맡았고 방송작가이자 소설가인 김인정 작가가 재현 시나리오를 썼다.
이번 재현행사는 놀이패 신명과 문화관광탐험대가 500년전 선비들의 모습으로 돌아가 생동감을 더했다.
성산계류탁열도 재현행사는 단순히 옛 그림을 현실로 옮긴 것에 그치지 않고, 세월의 더께 속에 여전히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인 식영정과 부영정, 환벽당과 함께 역사가 부활했음을 의미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 이미지로만 보던 옛 선비들의 모습이 고풍스런 건축물과 겹치면서 보는 이는 시간을 초월해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인 장면이 풀어진다.
그러나 고개를 돌리면 시원스럽게 달리는 자동차와 광주호에서 한가롭게 낚시를 즐기는 매우 현실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 색다른 경험을 가져다 준다.
복잡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열리는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이 이미 외국 관광객들의 이목을 잡았듯이 이번 성산계류탁열도 재현행사도 새로운 가능성을 읽을 수 있다.
생명이 없는 건축물이 지난 역사를 증거한다면, 역사적 장면을 재현한다면 훌륭한 우리 역사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죽어 있는 역사‘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를 쓰는 것 역시 후손들의 의무라면 광주문화재단의 새로운 시도는 괄목할 만 하다.
다만, 이번 재현행사가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가꿔 광주시민이 함께 할 수 있는 명품이 될 수 있다면 문화수도 광주를 대표할 만한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광주문화재단 박선정 사무처장은 "이번 `성산계류탁열도' 재현행사는 역사 유산을 현실로 끌어오면서 전통문화를 현전화(現前化)하는 시대극의 첫 시작"이라며 "무등산 누정 일대를 배경으로 재현공연을 정례화하면 관광상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